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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 미학은 왜 필요할까? – 38세 사진가 피트 뮬러의 이야기

시작부터 과정과 그 결과까지 어느 하나 정해진 잣대가 없어 막막한 것이 작가의 삶이다.

정해진 길도, 방법도 없다. 다른 작가를 무분별하게 모방하거나, 유사한 결과물을 내놓아선 안 된다는 것이 작가의 기본. 흔한 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야 하고, 창의성이 중요한 덕목인 작가는 과연 무엇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오늘 RP서울의 포스팅은, 우리가 지켜 본 상황에 대한 진단과 그에 대한 제안 한 가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학력, 수상경력, 순간의 감정(유행)

학력 수상경력 전시경력… 쉬운 지표이기에 아직도 기준이 되고 있는 것들.

젊은 작가가 전시를 열고, 관객을 만나며, 시장으로도 진출하는 경로는 과연 무엇일까? 한국의 상업 갤러리와 전시 기획자 중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학력’과 ‘수상경력’을 은연 중에 염두에 두는 경향을 볼 수 있다.

과거엔 단순히 학력이 좋고 나쁨(그런 것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을 따졌다면, 지금은 좀 더 은유적인 양상으로 같은 학교 출신들이 좀 더 쉽게 주목을 받거나 기획전에 포함되는 경향을 보인다.

개인적 경험에 따르면 그러나 이는 학력에 의해 작가들을 차별한다기보다는, 작품 자체를 보고 판단하는 것을 무의식중에 ‘객관적이지 못하다’고 여기거나, 기획자나 딜러가 스스로의 눈을 믿지 못하는 경우에 해당했다.

작품 자체만 보고도 기획자나 갤러리스트가 확신이 있다면, 학력이나 수상 경력 없이도 관객이나 컬렉터를 설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것에 자신이 없으니 ‘이 작가는 어느 학교를 나왔어요’, ‘이 작가는 어느 상을 수상했어요’라는 근거가 붙게 된다.

심지어 해외 작가도 ‘터너상’이나 ‘베니스비엔날레’처럼, 영국과 이탈리아가 자국 중심의 미술사를 쓰기 위해 만든 제도를 객관적인 기준처럼 여기는 경우도 있다.

“이 작품 좋아요” “왜 좋은가요?” “느낌이 좋잖아요” “그 느낌이 뭔데요?” “이런 느낌이 제 취향이에요” “그 취향의 근거는 뭐죠?” …..

여기에 끼어드는 또 한 가지가 바로 ‘감정적인 가치’다. 그냥 즐겁게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이 ‘아 이 그림 좋다’라고 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편안하게 구경하는 관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획자나 딜러가 “이 그림 좋아요”라고 말할 때는 책임이 따른다. 기획자는 이 그림이 좋다고 전시에 선보일 때, 그것이 왜 공공의 장소에 보일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인지를 여러 툴을 활용해 설명해주어야 한다.

또 딜러가 “이 그림 좋아요”라고 판매할 때는, 그것이 일회성 소비를 위한 키치미술이 아니라면, 어떠한 미학적,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는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근거가 학력이나 수상 경력이라면 자신의 책임을 다른 기준에 맡기는 것일 뿐이다.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이것이 사회적으로도 좋음을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음을 딜러와 기획자, 또 작가는 어떻게 설득시켜야 할까?

한가지 정해진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술사를 거쳐 확립된 보편적 방법 중 확실한 하나는 바로 자신의 작품을 ‘미학’으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피트 뮬러의 사진 작품과 솔라스탤지아(Solastalgia)

페루 키스피칸치 부족은 매년 빙하 지역을 건너는 순례에 나선다. 이들은 빙하 속 신이 치유의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기에, 순례 때 얼음을 조금씩 깨어 먹는다. 그런데 기후 변화로 빙하가 급격히 녹으면서 얼음 채취가 금지됐다. 이 부족의 신뢰 체계에도 문제가 생겼다. 사진: Pete Muller

이 사진은 미국 출신의 사진가 피트 뮬러(Pete Muller)가 페루 쿠스코의 한 지방인 키스피칸치의 부족들이 매년 행하는 순례를 포착한 사진이다.

카라바조의 그림같은 빛의 극적인 대조가 돋보인다. 그러나 이 사진이 단순히 키스피칸치 부족을 묘사하는 것이었다면, 그저 기교가 뛰어난 장식적 효과를 지닌 보도사진에 불과하다.

이 사진이 보도사진을 넘어 예술사진의 경지에 오르게 된 것은, 뮬러가 사진 작업에 나서기 전 연구하고 적극적으로 적용한 이론, ‘솔라스탤지아'(Solastalgia)가 뒷받침이 된 덕분이다.

사진: Pete Muller

솔라스탤지아 개념의 탄생은 사진 속 이 곳, 호주의 헌터 밸리에서 출발한다.

먼저 솔라스탤지아는 Solace(위안)과 Nostalgia(향수)의 합성어로, 기후와 환경의 변화로 익숙했던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

이 개념을 만든 호주의 철학자 글렌 알브레히트는 자신을 비롯한 호주 헌터밸리 주민들이 겪은 감정을 표현할 방법을 찾다가, ‘솔라스탤지아’라는 단어를 만들게 됐다.

그가 솔라스탤지아를 제안할 무렵인 2000년대 헌터밸리는 폭발적으로 늘어난 광산 개발로 주민들이 스트레스를 겪고 있었다. 위 사진에서 보이는 산은 원래 푸른 나무로 뒤덮인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런데 무분별한 개발로 그러한 풍경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주민들이 겪는 감정은 단순한 아쉬움을 넘어섰다. 평생 우울증을 모르고 살았던 중년 남성이 변한 환경으로 자신도 모르게 불안함을 겪고,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무의식 중에 사람들은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글렌은 ‘집(house)에 있으면서도 집(home)이 그리운 감정’을 이름지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명명함으로써, 나만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며 서로 공감하며 연대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Glenn Albrecht. 사진:Thinkerview(CC BY-SA 4.0)

전 세계에 헌터밸리 주민과 비슷한 감정을 겪는 사람들이 존재했고, ‘솔라스탤지아’는 인터넷을 통해 퍼져 나가면서 전혀 다른 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연결지어 주기 시작했다.

뮬러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솔라스탤지아를 논문에서 접한 그는 이 개념에 매력을 느끼고, 세계 곳곳의 솔라스탤지아를 겪은 사람들을 소재로 작품을 시작했다. 호주, 미국, 페루 등 다양한 대륙을 오가며 연결 고리가 맺어졌다.

미학의 힘

‘솔라스탤지아’라는 철학적 맥락이 더해지면서, 뮬러의 작업도 다른 위상을 갖게 된다. 만약 ‘솔라스탤지아’라는 맥락이 없다면, 뮬러의 작업은 환경 변화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게 된다. 그런데 ‘솔라스탤지아’라는 일정한 논리를 갖춘 미학이 더해지면서, 그의 사진은 2000년대 인간사가 마주한 하나의 현실을 감성적으로 담은 ‘작품’이 된다.

이 과정을 앞서 말한 ‘감정적 가치’의 한계에 비추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만약 이 사진 작품이 ‘감정적 가치’에 그쳤다면, ‘슬프다’, ‘불쌍하다’, ‘안타깝다’ 정도의 감정만 남발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을 넘어 ‘감성’적 가치를 갖게 된 것은, ‘인류가 무분별한 개발로 맞이하게 된 환경 변화 앞에서 새로운 조건을 맞이하게 됐음’을 뮬러의 사진은 논리적으로도 뒷받침하고 있다. 즉 ‘감성’이란 휘발성이 강한 ‘감정’에 이성과 논리를 부여해 생생하게 살아있는 의미를 만들어낸 것을 말한다.

개념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개념과 미학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

사실 ‘유행하는’ 이론이나 미학이 마치 코에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처럼 여러 작품에 쓰이는 것도 종종 볼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흐름과 달라지려면, 기획자나 평론가, 작가도 개념과 이론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나 어딘가에서 유행하는 것만이 확립된 개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것 또한 스스로의 사고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정해진 개념에 맞추려는 것은 모더니즘보다도 더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 아닐까?

모든 개념과 이론은 처음 시작할 때는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 되다가, 점차 그것에 여러 의견에 보태지고 정제되면서 정립되어 간다.

그러한 개념이 지속력을 갖는다면, 이와 연결된 작품 또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간이 지나도 다른 의미를 생성될 수 있을 것이다.

미학의 뒷받침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그 작품이 세상을 담는 방식에 대한 증언인 것이다. 우리가 작품을 만날 때도 작가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권순철 작가의 얼굴 드로잉

또 이런 방식은 이제 더이상 작가에게만 요구되지 않는다. 기존의 시스템이 무너지는 사회에서 자기만의 길을 개척해야 하는 모든 개인은,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가치 체계를 일구어 나가야만 한다. 의미도, 방식도, 결과도 자신이 정하고 책임지는 것이다.

더 이상 누가 정해주고, 가르쳐주길 기다리지 말자. 내 몸과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2 replies on “작가에게 미학은 왜 필요할까? – 38세 사진가 피트 뮬러의 이야기”

이미 (서구에서) 확립된 개념만을 수입해서 적용하려는 손쉬운 접근이 너무나 팽배하죠. 자신만의 개념을 창안하고 그것이 점차 퍼져나가면서 뉴노멀로 정립될 수도 있는 것인데… 그런 문화가 확산되려면 권력을 가진자들(요컨대 심사위원,지도교수,기관장 등등)이 누군가가 새롭게 제안하는 개념을 포용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게 현실입니다. 스스로 저명하지 못하면 선행연구에 무조건 따라야만 패스할 수 있는거죠. 하기사 데리다조차 “창안하지 말고 규정을 받아 들이라”고 지도교수에게 종용을 받았다고 하니…. 열린 마음이 없는 것은 동서고금이나 마찬가지인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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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그 닫힌 마음들을 두드렸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조금씩 바꾸어 나가는 것이겠지요.. 현실은 예나 지금이나 만만치 않다는 말씀이 공감되면서, 그런 가운데 자신만의 이야기를 들려 준 사람들이 또 더 대단하게 보이게 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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