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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의 아내를 울린 초상화

1913년 프랑스의 화가 앙리 마티스는 자신의 아내 에밀리 마티스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림 속 여인은 깊고 푸른 배경, 녹색 의자와 마치 하나가 된 듯 딱딱하게 굳어 있다. 납작한 옷 속의 몸이 사람이라는 걸 애써 증명하듯 노란 숄이 위태롭게 둘러져 있다. 그리고 얼굴은 마치 석고상처럼 회색으로 변해버린 모습이다.

이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Hilary Spurling이 쓴 전기 ‘Matisse the Master: A Life of Henri Matisse – The Conquest of Colour, 1909-1954’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영국의 저술가이자 전기 작가인 힐러리 스펄링은 1998년과 2005년 두 번에 걸쳐 마티스의 전기를 썼다. 꼼꼼한 고증과 합리적인 상상력을 토대로 한 그녀의 서술은 작가의 전기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중 한 에피소드가 바로 이 아멜리 마티스 초상에 관한 이야기다.

스펄링은 우선 앙리 마티스가 이 그림을 그리기 전 세잔의 초상을 유심히 여겨봤다는 것을 알려 준다. 조각상 같은 인물의 자세와 기하학적 형태에서 세잔의 초상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5월 파리에서 세잔이 그린 ‘노란 의자에 앉은 여자’를 본 마티스는 아멜리의 초상화에서 비슷한 구도를 시도했다. 조개 껍질 같은 타원형의 얼굴에 묻은 부드러움, 비스듬이 기울어 우아한 머리. 그런데 아멜리는 남편의 초상화 속에서 자신만의 기품과 꼿꼿한 성품을 품어 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앙리 마티스와 아멜리가 함께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은 아주 혹독했다고도 소개한다.

“앙리는 예술의 중심에 감성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느낌을 제어하고 정제해 캔버스에 옮겨야만 중요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고, 그는 자주 가족에게 쓴 편지에서 강조했다.”

두 사람은 초상화를 위해 100번도 넘게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 하루에 한 번, 많게는 두 번식 아멜리는 앙리의 앞에 앉았다. 스펄링은 그림 속 표현을 넘어 마주 앉은 두 사람의 마음을 더듬는다.

“초상화는 앙리와 아멜리가 서로를 다시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두 사람 모두에게 엄청난 집중을 요구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15년 동안 함께한 두 사람의 결혼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앙리는 젊은 예술 학도에서 뉴욕과 모스크바까지 주목하는 미술계 주요 인사가 됐다. 국경을 넘어 그를 지지하는 컬렉터와 평론가가 생겼다. 자신의 집과 충분한 작업 공간, 일정한 수입도 갖게 됐다. 두 부부는 아멜리가 처음 앙리를 지원하기로 결심했을 때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꿈을 이뤘다.

그런데 아멜리는 그 성공에 따르는 필연적 귀결을 예견하진 못했다. 앙리에게 언젠가 아내의 헌신이 필요 없을 때가 온다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가진 섬세함과 용기, 에너지는 위기 상황에선 한없이 값진 것이었지만, 안정된 미래가 펼쳐진 상황에선 잉여 가치가 됐다.

이 그림이 그려진 이후 3년 간 앙리를 찾은 사람들은 아멜리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늘 자리에 없었고 대부분은 아팠다.”

마티스 부인의 초상(1913)

아멜리는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어쩌면 그녀는 결혼 초기 스페인식 옷을 입고 모델을 했던 기억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돈이 없어 쪼들렸던 마티스 부부는 상업 그림을 그려보자며, 투우사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긴장한 가운데 아멜리가 옷을 입고 서자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리며 포기했다.

앙리가 8년 전 그린 ‘Woman with a Hat’에서 그린 대담하고 솔직하며 도전적인 눈빛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림 속 여자는 고요하게 뒤로 물러나는 모습이었다. 두 초상화는 두 부부의 열정적이고 영웅적인 협업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고 있었다.

Woman with a Hat

아내이자 모델인 아멜리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자신만의 그림 문법을 위해 혹독하게 대상으로 만들어 그려낸 화가. 그런 화가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고 눈물 흘리는 여자. 마티스의 그림을 사적인 영역까지 엮어서 풀어낸 이보다 더 명쾌한 해석이 있을까.

스펄링의 서술에서 인상 깊었던 건 두 가지였다. 화가와 그의 그림, 주변 인물을 직시하는 전기 작가의 눈, 그리고 ‘감정을 정제해야 한다’는 마티스의 예술론이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좋은 글에 대한 이야기도 될 수 있다. 감정과 수식어를 남발하고, 대상을 무조건 찬양하는 글이 아니라; 감정과 이성을 적절히 배치하며 작가가 중심을 잡고 관점으로 풀어나가는 글. 이런 글이 미술에서 필요한 글이 아닐까? 글의 소재가 되는 작가나 작품을 기분좋게 해주려는 소심한 글이 아닌, 읽는 사람에게 하나의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생산적인 의논과 토론을 하기 위한 글 말이다.


스펄링의 사려 깊은 글을 읽어 내려가며, 오로지 그림이 우선인 화가, 그리고 그런 그를 너무 잘 알지만 때로는 남편의 아내이고 싶은 여자의 마음이 와닿아 찡한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 앙리는 10년 뒤 아멜리의 초상을 ‘마치 책 사이에 끼운 꽃갈피의 아련한 달콤함처럼 기억하며’ 이렇게 언급했다고 한다.

“그 초상화 기억나? 당신은 울음을 터뜨렸지만, 그 속의 당신은 정말 예쁘기만 했던 그 그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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