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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딛은 발과 몸으로 시작되는 사유의 세계 – 리베카 솔닛 ‘A Book of Migrations’

‘맨스플레인’으로 국내에도 유명한 작가 리베카 솔닛의 초기 책 ‘A Book of Migration’이 ‘마음의 발걸음’이라는 제목으로 최근 출간됐다. 신간이라서 훑어보던 이 책에서 의외의 흥미로운 사유들을 만나게 되어 RP블로그에 공유하기로 했다.

이 책은 솔닛이 아일랜드를 (대부분) 도보로 여행하며 보고 듣고 느꼈던 사유들을 엮고 있다. 솔닛은 서문에서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다른 나라라는 미지의 영토로 떠나면서 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 또한 내적 자아라는 영토를 탐험하는 것이었다. [...] 내가 이 책을 쓰면서 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 내적 경험이라는 겹을 여행에 포함시키는 것, 그리고 이로써 여행수필의 관행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책에서 이어지는 글들은 과거의 체제가 강요한 정체성(핏줄, 국가, 민족)과 개인의 신체가 느끼는 정체성의 간극에 관한 탐험이다. 우연히 자신이 아일랜드 혈통을 갖고 있다는 걸 알게된 그는, 아일랜드 여행을 떠나면서 오히려 그 혈통이라는 것이 ‘신앙고백’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반문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발로 땅을 터벅터벅 딛어 나가며, 스스로의 몸과 그것이 살아온 세월, 그 깊은 곳까지 얽힌 곳들을 탐험하며 살로 느껴지는 정체성을 체험해 나간다.

‘신자연주의 예술’은 솔닛의 저작처럼 개인의 몸에서 배어 나오는 예술을 말한다. ‘몸에서 나온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 이해를 돕기 위해 책 속 구절을 발췌해 아래에 정리했다.


나는 기억과 정체성 사이의 상호작용, 몸의 움직임과 세상의 풍경 사이의 상호작용을 탐구해보고 싶었다. 유입되고 유출되는 인구 집단들의 침입과 탈출, 식민과 이민, 관광과 유랑을 탐구해보고도 싶었다.

이번 아일랜드 여행은 그런 탐구의 가능성들을 활짝 열어준 여행이었다.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내가 속한 미국 액티비즘과 내가 얻은 아일랜드 여권이 제기하는 정체성 정치의 문제에 대해서 성찰해 볼 수 있었고, 위대한 문학작품이라는 지위와 중요한 문화 자료라는 지위를 분리해 볼 수 있었고(대영제국 드라마의 이면으로서의 아일랜드는 그런 식의 분리 작업을 위한 이상적 장소다.), 최신 담론의 가지런했던 용어들(원주민이니 백인이니 유럽이니 제1세계니 하는 용어들)이 해지고 찢어지기 시작하는 지점에 주목해 볼 수 있었다.

👉 위의 글은 서문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솔닛은 기존의 체제가 규정한 정체성이 아닌 자신의 기억, 몸의 움직임에 기반한 것을 탐구하려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정체성과 유산을 얻는 일이 쇼핑처럼 간단한 과정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정체성과 유산을 얻는다는 것은 근본적인 어떤 것을 내기에 건다는 의미가 있는데, 그런 사람들의 정체성 흉내는 바로 그 의미를 훼손하고 있다.
피부가 국경이라면, 피부라는 국경은 열린 국경이다.

밖이 안에 의해 감각되기도 하고 안의 일부가 밖으로 빠져나가기도 하고 밖이 안을 자극하기도 하고 안이 밖의 일부를 흡수하기도 한다.

하지만 피부가 글자 그대로 폐쇄된 국경인 면도 있다.

몸의 3분의 2를 구성하는 물은 몸 밖으로 흘러 나가 존재의 수원에 가닿고자 하니,

피부가 없다면 몸은 별개의 국가로 존재하는 대신 세계 만국의 일부가 되어 사라져버릴 것이다.

👉 다만 그것이 정체성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아일랜드를 몸으로 부딪치며 ‘혈통’이라는 주어진 것이 아닌 스스로 느끼는 근원을 탐구하고 있다.

유년기가 처음 느껴본 감각들, 처음 당해본 고통들로 이루어진 세계라면, 우리에게 유년기는 잃어버린 세계일 수밖에 없다.

유년기가 집이라면, 우리는 집을 잃은 난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 안에 한번 뿌리내린 집은 영원히 우리를 놔주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가 몸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는 물체라는 식의 생각은 내면이라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집을 은폐하는 픽션일 뿐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의 나는 나의 세계라는 동심원들 안에 머물러 있었다.

가장 안쪽 원이던 나의 집은 나라는 한 마리 짐승에게 마치 달팽이의 껍질처럼 아늑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다음 원이던 나의 친구들은 나의 여러 가능성을 끌어내주었다. 친구들과의 대화 중에 비로소 해보게 된 생각들, 해보게 된 말들이 있었다.

다음 원은 내가 사는 동네였다. 어렸을 때 살았었고 커서도 계속 꿈에 나오는 7번가로부터 불과 50킬로미터 거리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는 마치 두 번째 피부인 듯 친숙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정주의 세계, 전 코페르니쿠스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 이런 동심원의 가장 바깥쪽에서는 가계와 종족의 원이 더없이 희미한 파문을 그리고 있었다.
니체에 따르면 진리란 은유라는 사실을 망각당한 은유다.

“진리란 은유법들과 수사법들의 기동부대요, […]

은유와 수사를 통해 고양되고 변모되고 미화된 상태로 오랫동안 통용됨으로써 불변성, 진정성, 규범성을 얻은 인간관계들의 총체요, […]

닳고 닳은 탓에 감각적 위력을 잃어버린 은유들이다.” 
봉건시대에는 합일의 토대가 추상이 아니라 왕의 신체(body of the king)라는 구체적인 몸, 곧 하느님의 봉건질서의 머리에 앉혀준 몸이었다.

왕의 두 신체(two bodies of the king)라는 상상 속에서 왕의 신체는 글자 그대로의 몸이기도 하고 만세를 누리는 정치체이기도 했다.

왕의 두 신체라는 상상을 대체한 것이 바로 종족국민주의였다.

종족국민주의의 상상 속에서는 한종족 또는 한 나라가 곧 한 몸이었고, 그 종족의 선민들은 모두 그 몸의 일부분이었다.

봉건시대에 왕의 두 신체가 있었다면 이후에는 국민주의의 신체가 있었다.
정복수, 몸을 음미하는 방법, 1994, 캔버스에 유채, 130.3×162.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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