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연주의 두 몸의 만남’-가나인, 정복수

신자연주의 미학은 2017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신자연주의 두 몸의 만남-가나인, 정복수’전을 통해 국내에서 다시 선보였습니다.

신자연주의 선언문을 본 평범한 대학생 레이첼의 감상

인간의 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삶의 구조, 내 몸이 곧 세계 질서의 기초라는 생각은 이미 낯선 생각이 아닙니다.

예술가들은 자연스럽게 감각을 통해 자신의 몸에서 나온 시각 언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대학생 레이첼이 신자연주의 선언문을 보고 거리낌없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한국에서 출발한 신자연주의 미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담고 있으며, 탈구조주의 이후 복합다중구조시대에 걸맞는 미학이라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증명하는 자리가 바로 2017년 서울 전시였습니다.

또 서양의 눈이나 일본의 눈을 빌린 미학이 아닌, 한국의 독자적인 미학과 이를 보여주는 작품을 통한 한국 미술의 진정성을 찾는 작업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정복수, 화가의 자궁

국내 예술가 중 세계미술사 속에 살아 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작가가 바로 정복수입니다. 단색화의 조악한 이론이나 약한 미학적 배경과 달리 정복수작가는 탈구조주의 시대 걸맞는 몸을 주제로 작품을 선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 미술계가 주목할 만한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작가만의 조형언어로 빚어진 몸을 정복수작가 에게서 엿볼 수 있습니다. 

메를로 퐁티가 제시한 사유하고 지각하는 몸 개념 이후, 들뢰즈의 구체화되지 않은 탈구조주의 허약한 몸개념을  동양 화엄사상을 토대로, 동서미학을 융합하여 출발한  신자연주의 몸을 정복수작가는 이미지로 드러냈습니다

가나인 ‘난민’ (2017년)

이 전시에서 가나인의 1980년대 그림시부터 신작 ‘난민’ 과 ‘적요심곡’ 시리즈를 전반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가나인의 그림시는 권위적인 정부와 식민 지배의 흔적 아래 오염된 언어를 해체하고 나만의 목소리를 찾기 위한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대가 부르기 이전에도 나는 이미 꽃이었다’도 마찬가지. 이 작품은 누군가가 정해준 관념과 개념 속에 살아간다고 여겼던 과거의 사상과 결별을 선언합니다. 이제 개인은 자신의 몸와 삶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며, 누가 불러주지 않아도 꽃을 피울 수 있는 독립적이며 온전한 개체입니다.

이어지는 난민 시리즈는 소용돌이에 휩싸인 현대 인간의 조건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난민은 살 곳을 잃고 자신의 욕망과 생존을 위해 몸을 이끌고 다른 곳을 찾아가는 적극적인 주체입니다.

구시대적 시스템에서 골치거리로 여겨지지만 이들은, 능동적으로 몸을 움직여 자신의 환경을 개척하는 신자연주의적 인간의 삶을 보여줍니다. 그림 속 난민들이 지고 있는 소용돌이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동시에 암시하고 있습니다.

‘신자연주의 두 몸의 만남’ 전 오프닝 현장

전시 현장에는 한국 미술을 걱정하는 많은 관객들이 찾아왔습니다. 독특하고 강렬한 시각 언어는 최근 열린 어느 전시보다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미술계에서는 ‘구태의연한 사조로 ‘상품화’하는 기존과 차별되는 전략이 신선했다’는 반응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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